"앞으로의 이야기는 사실을 재구성하여 작성되었으며 특정인과 관계가 없습니다"
전쟁통에서도 사랑은 싹튼다더니, 그지같은 우리회사에도 내가 의지하고 존경할 분들이 있다. 내 인생/학교 선배이자, 내 멘토이자, 내 롤모델인 분인데 물론 그 분은 본인이 이런 중책을 맡고 계신지 모른다.
최근 그 분의 글을 읽을 기회가 있었는데,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2년여간 그 분을 알고 지내면서 한번도 들려주시지 않았던 속깊은 내용이었다.
분노와 욕설이 가득한 내 글과는 달리 담담하고 꾸밈없는 글을 읽고 "나 이런 부정적인 글만 써도 되는걸까?"라는 반성과 함께, 예전 박경리 작가님에 대한 기사가 떠올랐다. 전쟁통에 남편을 잃고, 몇년 뒤 아들까지 잃은 뒤에도 냉철하게 소설을 쓴 작가님에 대한 이야기였다.
"하나의 어린 생명이 부당하게, 그리고 처참하게 도수장의 망아지처럼 없어졌다는 일은 도처에서 언제나 일어나고 있는 사소한 사건입니다." 납득하기 어려운 슬픔을 겪으면서도 박경리는 자신의 고통을 과장하지 않았고, 더 큰 고통에 처한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품위란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성,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경향신문, 2019. 5. 21.)
선배는 나한테 한번도 힘들다거나, 자신의 고통을 전시한 적이 없었는데.. 선배가 품위있는 사람이라 그랬던거였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그리고 나는 우리 선배님처럼 품위있는 사람은 못될 것 같다는 반성을 하면서... 오늘의 이야기는 자기자신의 연민으로 고통조차도 1등을 해야하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팀원 H씨는 인정욕구가 강하고 모든 화제의 중심이 본인이 되어야 하는 스타일이다. 심지어 확증편향이 심해서 본인이 말한 10개 중 1개만 맞아도 그것 보라며 내가 맞지 않았냐고 목소리를 높이는 스타일이라 동료로서는 상당히 피곤한 편이다.
그래도 나는 유교걸이므로 연장자에 대한 우대정신으로 나름의 관계를 유지하며 지내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작년 9월, 아빠의 암 판정으로 수술을 앞두고 있던 때, H씨와 나의 불행배틀이 벌어졌다.
처음 시작이 배틀이었던 건 아니었다. 당시의 난 불안한 마음에 누군가에게서든 괜찮다는 말을 듣고 싶어했고, 불안한 마음을 소모하고 싶어 아빠의 암에 대한 걱정을 쉽게 털어놓곤 했다.
화장실에서 만난 H씨에게 내 사연을 털어놓자 "걱정이 많겠다"라는 한마디의 말을 한 뒤 본인의 아버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요약하자면 본인의 아버지는 전립선 비대증(참고로 우리 아빠가 판정받은 암과는 전혀 상관없는 부위다)을 앓았는데, 그래서 밤새 잠을 못자고 사타구니를 밤새도록 긁어서 피범벅이 되었으며 어머니가 깜짝 놀라 응급실로 실려갔고 본인이 매우 힘들었다는 이야기. 간단하게 요약했지만 실제로 그 이야기는 매우 장황했다.
나는 "우리 아빠 암이래요."라는 한마디 걱정을 내뱉었을 뿐인데, H씨는 10분이 넘는 시간동안 본인 아버지의 전립성 비대증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결국 내가 H씨에게 "많이 힘드셨겠어요. 아버지 괜찮으실거예요."라고 H씨를 위로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배틀이라기엔 난 KO당했고, 그녀의 자기중심적인 성격에 난 상대가 안된다. 애시당초 체급도 확인 안하고, 사람 안가리고 덤벼든 내가 어리석었던 것이다. 과도한 자기연민과 자기중심적 사고는 스스로뿐만 아니라 주변까지도 병들게 한다는 것이 그 배틀의 교훈이랄까?
선배님한테 아버지 이야기를 털어놓았을 때 느꼈던 그 위로, 안정감같은 걸 기대한 내가 등신인거지 싶다. 뭘 바래, 우리 팀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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