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존경하는 선배님이 은퇴를 하셨다.
이 선배님이 '연륜에서 비롯된 업무능력+끊임없는 자아성찰+소탈함과 솔직함'을 다 갖춘 분이시다보니 난 더 같이 일하면서 다양한 것들을 선배님에게 배우고 싶기도 했고, 여러모로 의지하고싶고 그랬었다. 30년이 넘는 시간동안 유지해오신 일상이 한순간에 바뀔 선배의 마음보다 내 감상만 이기적으로 생각하면서 선배를 붙잡고 싶었던 것 같다. 이기심의 끝판왕처럼 '선배님 안계시면 난 어쩌나' 하는 생각이 너무나 컸는데, 변명을 하자면 선배는 어차피 이 곳을 떠나시는 순간 훨씬 더 행복하고 즐겁고 바쁘게 사실것이 자명했기에 맘놓고 내 감상에만 젖어 있었음 ㅋㅋㅋ
여하간에 선배님의 은퇴과정에서 있었던 몇가지 이야기를 들으며, 몇 가지 고찰할 주제들이 있었다.
그 중 한가지는 '내 존재가치를 어떻게 입증할 것인가'였다.
솔직히 말하면 저건 너무 고상한 표현이고, 툭까놓고 말하자면 내가 맡은 직무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깝게 보이는 상황이라는 것을 느꼈다고나 할까.
구체적인 상황은 이런거였다. 선배님의 출근 마지막 날, 회사에 있는 상사들의 사무실을 방문하며 인사를 하는 중이었는데 그 중 한명이 인공지능이 대중화되는 사회를 빗대어 말하며 선배의 직무를 '하향산업'인 것 마냥 말을 했다고 했다. 성질머리가 드러운 나는 여기까지만 들어도 화가 뻗쳐서 속으로 쌍욕을 하고 있었는데, 선배는 그의 말 중 긍정할 것은 긍정하면서 선배의 직무분야가 얼마나 많은 변화를 겪어왔는지 그리고 현재 이 분야의 실태에 대해 말해주셨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배 직무의 필요성에 대한 생각까지도 말씀해주셨는데 나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화만 내려한 것이 조금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뒤이어, 상사는 내 직무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말을 했다고 한다. 내 업무는 AI로 대체가 가능하고, 결국 필요없는 직무가 될 것이라는 그런 말. 근데 그 뒤에 상사가 한 말이 아주 흥미로웠다. "근데 내(상사) 직무는 절대로 대체 불가"라고 했다는 것.
매우 흥미로웠고, 또 매우 비꼬고 싶은 생각이 많이 들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리고 나를 활용하는 사람들이 내 존재가치를 낮게 평가하고 있다면, 어떻게 입증하고 어떻게 가치를 재설정 할 것인가도 매우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일단 상사의 직무분석 겸 비꼬기를 먼저 해야 내 속이 시원할 것 같아서 그것부터 자세히 말하자면 이렇다.
먼저 상사의 직무에서 소위 '인정하고 먹어주는' 주요역량을 파악해보자. 물론 이건 내가 생각하는 역량이니, 반박시 당신의 말도 존중합니다.
1 | 염치가 없고 뻔뻔하여 부끄러운 말을 당차게 할 수 있을 것. 틀려도 일단 우기고 상대방에게 호통을 칠수 있는 담대함 |
2 | 논리보다는 의리와 충성심에 기반한 업무처리. 충성충성충성^^7하면서 밀고나가는 추진력 |
3 | 내편 니편 나누면서 건달처럼 패거리를 형성할 것 |
4 | 2번에서 말한 의리와 충성심은 결국 자신에게 떨어지는 콩고물을 위한 것으로 자신의 주머니를 잘 챙길 수 있는 이기심 |
5 | 1에서 4번을 실행하면서 발생하는 타인의 고통과 상처는 나몰라라 할 수 있는 비열함 |
6 | 몸싸움에 능할 것. 필요할 땐 책상도 엎고, 고래고래 소리도 지르고, 바닥에 드러누울줄도 아는 대범함 |
그럼, 과연 이 역량을 AI가 대체할 수 있는가도 생각해보자.
하. 상사말이 맞다. 저건 AI가 도저히 대체할 수가 없는 역량이다. 일단 내가 사용해본 AI는 틀린 답변을 아무렇지 않게 하기도 하지만 나의 지적에 빠른 사과와 반성을 보이고 이용자에 우선하는 업무처리를 수행한다. 아, 물론 대답방향을 '무조건 우기는 방식'으로 하라고 설정하면 조금은 가능할수도 있겠다.
하지만 수많은 AI들은 '윤리원칙'을 설정하고 이를 지키고 있기 때문에.. 우리 상사들처럼 부정부패를 저지른다거나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말은 기본적으로 하지 못하게 되어 있기에.. 그래 역시 대체가 불가능하겠어.
게다가 몸싸움은 어떠한가. 물론 인간의 몸은 자연에 비해 연비도 좋지 않고, 아주 연약하고, 효율성이 좋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필요시 과격한 몸싸움을 두려움 없이 펼친다. (물론 싸우는 양쪽 다 적절하게 몸을 사려가면서 육탄전을 한다는 점+둘다 근육이라곤 1도 없는 최약체라는 점으로 큰일이 벌어지는 경우는 드문 것 같다.) 하지만 상사가 예를 들어준 Chat GPT는 몸싸움을 할수가 없다. 데이터센터에서 끊임없이 전기를 먹고 냉각수의 도움을 받아 질문에 대한 답을 만들어 내고 있을 뿐이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우리 상사의 직무는 AI로 대체가 불가능할 것 같다. 핵심역량을 재설정하지 않는 이상은 내 상사의 밥그릇은 지켜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나는 어떠한가. 내 직무가 정말 AI로 대체가 가능한지 알아보기 위해 내 직무의 핵심역량을 고민해보고자 했는데, 솔직히 말하면 비참해서 하기 싫어졌다. 상사의 주장에 의하면 '법률 고문', '정책적 검토' 같은 것을 AI가 충분히 해낼 수 있기 때문에 내 직무가 사라질 것이라는 것이었는데, 일단 내가 저 두가지 일을 많이 하고 있는가?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그리고 틀리거나 말았거나 원하는 답을 얻는 것만이 목표라면 당연히 AI로 대체가 가능할 것이고. (실제로 AI는 사용자의 의도에 맞게 원하는 답을 해주는 경우가 많다. 나중에 그거 너 틀렸다고 하면 '아 쏘리 내 실수'하는게 전부고)
근데 최근의 나는 페이퍼워크보다는 전화받기, 차 대접하기, 심기보좌, 휴대폰과 노트북 사용법 안내, 낯부끄러운 발언문 작성을 주로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이걸 AI가 수행하기는 좀 어렵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고 ㅋㅋㅋㅋㅋㅋ
그리고 우리 팀원들도 요래조래 입털면서 가십거리 수집하고 전달하기, 운전 등의 업무를 주로 수행하고 있어서 대체하기는 좀 어렵겠다, 그러나 굉장히 비참하다라는 생각을 멈출수가 없었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자기비하만큼 위험한 것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는 있으나, 이것이 현실이기에 이 상황을 어떻게 타파해야 하는가에 대해 좀 더 고민할 필요가 있겠다.
근데 또 생각해보면, 대체 불가한 일이 뭐 얼마나 많이 있을까 싶어서 그냥 다같이 AI가 일 대신 하게하고, 다같이 집에 누워서 놀면 안될까 하는 무식한 생각도 든다. 얼마나 이 회사가 지긋지긋하면 쟤가 저런 생각을 하겠어라고 너그러운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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